부산일보 - [하이! 우리 브랜드] 엔젤녹즙기
『수차례 역경 부도까지… 수출로 '오뚝이'처럼 재기』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다 한쪽으로 물러난 뒤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선 지역 브랜드가 있다. 녹즙기로 유명한 엔젤녹즙기가 바로 그런 브랜드다. 엔젤녹즙기의 김점두리(60) 사장이 부산 사하구 신평동 공장에서 들려준 엔젤녹즙기의 역사는 고난과 수난으로 점철돼 있었다.
엔젤녹즙기가 탄생한 것은 1984년께. 남편 이문현(65) 씨와 함께 운영하던 프레스공장이 자금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이 씨가 협심증에 걸린 것을 시작으로 온 가족이 신경성 질환을 앓을 정도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약으로 증세만 완화시키기 급급할 때 자연식을 권한 지인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완치되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쓰던 믹서가 수시로 고장이 나자 남편 이 씨가 프레스공장 운영 경험을 살려 녹즙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월 매출 50억 올리다 쇳가루 파동 직격탄
스테인리스 상품 개발, 해외 판로 개척
김 사장이 헌책방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등 4년 가까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고장 없이 채소 잎까지 잘 갈리는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즙을 짜는 기능이 아직 없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가였던 38만 원에 시장에 내놨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2년 뒤 김 사장 부부는 마침내 녹즙을 짜는 기능까지 갖춘 기계를 만들어 시장에 내 놨고 입소문을 타고 1년만에 월 50대씩 팔기 시작했다.
이후 당시로서는 유명세가 덜했던 길용우와 양미경을 투입해 '술 마신 뒤 간을 보호하는 녹즙이라는 콘셉트로 TV광고를 실시, 대박을 치게 됐다.
월 50대씩 팔리던 녹즙기는 매달 생산량이 배 이상 늘어났고 1991년에는 월 매출만 50억 원에 달할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 과정에서 타 업체와 특허분쟁이 발생했고 급기야는 1994년 방송에서 쇳가루가 나온다는 보도까지 얻어맞으며 갑자기 매출이 급감하고 말았다. 상공부의 재실험을 통해 무해 판정을 받았으나 자금경색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김 사장 부부는 결국 부도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미국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김 사장 부부는 관절염이나 당뇨병 환자들에게 과일즙과 녹즙을 짜 먹이는 자원봉사로 시름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효험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자 김 사장 부부는 1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김 사장 부부는 3년 만에 스테인리스 주조 방식을 도입한 새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제품 판로를 확보하기 위해 아직 쇳가루 파동의 기억이 남아 있는 국내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인터넷에 제품 설명을 올리고 기다리자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독일, 영국 등지에서 바이어들의 반응이 왔다. 고장 없고 다른 제품보다 즙을 많이 짜 내는 제품이라는 판단을 한 바이어들은 대당 100만 원을 호가하는 엔젤녹즙기를 고급 주스기라며 사갔다. 현재 연 36억 원가량의 매출 가운데 수출 비중이 97%에 이를 정도로 엔젤녹즙기는 오히려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김 사장은 "해외 시장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만큼 이제 다시 국내 시장을 본격적으로 노크해 보려고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엔젤녹즙기는 내년께 소매가 50만 원가량의 보급형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홈쇼핑을 통한 대량판매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상윤 기자 nurumi@busan.com